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 이방원(드라마)/역사 탐구 (문단 편집) === 22회 === * 원경왕후가 절차대로 혼자서 왕비 책봉식을 치뤘다. 왕비 책봉 의례 절차상 왕이 이미 즉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왕비가 따로 의례를 치르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다. 예전 사극 중에는 [[대왕 세종]]에서 [[소헌왕후]]가 따로 책봉 의례를 치르는 장면이 묘사된 적도 있다. 의상 면에서는 강씨가 책봉될 때와는 달리 실제 고증대로 중국식 심청색 적의(翟衣)를 입고 책봉식을 치렀다. 하지만 머리에는 용봉관을 쓰지 않고 평소처럼 가체만 얹고 나오는 걸로 묘사되었다. * 태종이 궁녀들과 합방을 일삼은 이유가 민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묘사되었다. * 민제가 후학을 사주하여 태종을 비판하는 시퀀스에 대해 각색을 넘어 왜곡 수준이라는 혹평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헌부 압송까지는 아니지만 전가식이 상소를 올린 것은 사실이고,[*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4001_001|태종 2년 4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다만 실제로는 호색 문제만 아니라 다른 정책들에 대해서도 주장한 상소였다. 그런데 호색 문제 지적에 대한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되었다.] 그가 순군에 압송된 후 민제를 언급하는 것도 사실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5011_001|태종 2년 5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 이 사건은 차후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10001_004|태종 8년 10월 1일 을해 4번째기사]]] * 태종이 원경왕후가 사가에서 데려온 여종과 합방하자 원경왕후를 모시는 대전상궁이 중전마마를 제치고 주상에게 교태를 부린 괘씸한 년이라며 한밤중까지 비맞게 하고 탈진해 쓰러지게 한다. 모티브인 [[효빈 김씨]]는 실제로 민씨 집안 여종이었다가 태종의 승은을 입고 아들을 낳자 격노한 원경왕후에 의해 한겨울에 내쫒겼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태종은 증언했다. 오늘날에는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효빈 김씨]] 참조. * 말미에 묘사된 민씨의 투기를 접하고 노한 태종이 가례색 설치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의외로 실제 기록에 근거한 묘사다. 태종실록 1권에는 민씨가 궁인들을 가까이하는 태종에 분노하여 한 궁인을 힐문한 것에 태종이 노하여 중궁전의 내관과 궁녀들을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태종실록 3권에 가례색 설치 명령을 내리고 하륜 등을 제조로 삼으라 지시한 기록이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